[봉동과 회안대군] 600여년 전 전북 완주 봉동 구만리로 자원해 거주... 영조때 봉강서원 창건'봉동과 용진, 법사산과 금상동' 명칭은 왕을 지칭하는 단어로 회안대군이 자리잡은 이곳 지명 예사롭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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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안대군 유상(초상화) |
[봉동시리즈 2회] 조선 개국공신인 회안대군(이방간)과 봉동의 인연은 6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안대군은 한강이남에서는 가장 큰 왕가(王家)라고 일컬어지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회안(懷安)이란 품을 회, 편안 안으로 '편안하게 품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1400년 발생한 2차왕자의 난에서 밀려난 회안대군이 여러 지역을 옮겨 살다가 자원해 살아온 곳이 구체적으로 봉동 구만리다. 구만리에서 20여년 동안 살았다. '봉동과 용진·삼례, 법사산과 금상동'이라는 단어는 왕을 지칭하는 뜻으로 해석돼 회안대군이 자리잡은 이곳 지명이 예사롭지가 않다.
봉동과 용진이라는 이름은 회안대군을 연상하는 뜻이 담긴 단어로 추정된다. 봉동의 옛지명 봉상은 봉황이 고을 일대를 날며 살고 있는 곳을 말한다. 용이 임금을 상징하기에 "회안대군이 언젠가 왕(용)으로 나갈(진) 어른으로 생각해 지명을 용진이라 칭했다. 삼례는 전주를 왕래하던 관리들이 삼례역에 이르러 동쪽에 살던 회안대군을 향해 3번의 예를 올린 곳이라 해서 삼례라 불렀다"고 이 마을 일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1364년에 출생한 회안대군 이방간(1364~1420년)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로 개국공신이다. 함경도 함흥 귀주동에서 태어났으며 57세에 타계했다. 휘는 방간, 호는 망우당, 군호는 회안대군, 시호는 양희, 봉은 마한공, 아버지 태조 이성계, 어머니 신의황후 한씨다.
배우자는 모두 3명으로, 첫째는 여흥민씨로 슬하에 1남 의녕을 두었다. 묘는 민씨 여주시 실전에 있다. 둘째는 밀양황씨로 1남2녀를 두었다. 창녕과 조신언, 이대성이다. 묘는 충남 서산시 부석면에 있다. 셋째는 금포금씨로 금성과 금산 2남을 두었다. 묘는 전주시 금상동 법사산에 있다. 예전에는 용진에 속했다.
![]() ▲ 전주시 금상동에 위치한 회안대군 묘 |
방간 회안대군은 고려때 소윤과 익찬공을 지냈으며 조선개국때는 아버지 이태조를 도와 공신에 오른다. 조선의 2대왕인 정종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차례에 따라 왕위 계승자로 떠올랐으나 다섯째 이방원이 더 유력했다. 그러자 당시 지중추원사 박포는 "정안대군이 장차 회안대군을 죽이려 한다"고 회안대군에게 거짓으로 충동질을 한다.
이에 회안대군이 1400년 1월 군사를 일으켜 개경에서 동생 방원과 싸웠으나 패했다. 박포는 선동죄로 사형당하고 회안대군은 처형을 면했다. 방원이 여러번 형에게 은교를 베풀었으나 신하들의 잇따른 상소로 결국 1400년 1월 말쯤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된다.
이후 안산-익주(익산)로 이배지를 옮겼으며, 1402년 12월에 전남 순천으로 이배했다. 그러다 1404년 5월9일 전북 익주(익산)로 이치됐다. 이후 1405~6년쯤 당시 전주 행정구역인 봉동 구만리지역으로 거처를 옮겨 천내(川內)마을에 자리잡고 살았다.
1408년 5월24일 아버지인 당시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 복상하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여겨 다시는 한강을 건너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훗날 자손들에게도 이곳에 살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봉동과 삼례, 김제, 전주 일대에는 전주이씨 회안대군파 집성촌들이 많이 있다.
1409년 셋째아들 이선(금성군)이 태어났으며 1413년에 넷째아들 이중군(금산군)이 태어났다.
회안대군은 토산-안산-익산-순천-익주(익산)-전주(봉동 구만리)-홍주(홍성) 등지로 이어졌다. 세종2년 1420년 조카 세종이 왕명으로 부를 때 "천은이 망극하오나 잔명을 부성(구만리)에서 보내고자 합니다"라며 사양했다. 태종실록에는 한강을 건너지 않겠다는 서약을 어기도록 강요한 세력들의 모략에 의해 부득이 서울로 올라가던중 1421년 3월9일 충남 홍주(홍성)에서 파란만장한 풍운의 일생을 마쳤다. 반면 이씨 문중 종보에는 충남 은진(논산)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 ▲ 회안대군이 부친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 복상하지 못해 구만리 뒷산에 올라 애통해 울었다는 망곡제. 멀리 만경강과 봉실산이 보인다. |
묘소는 전주시 금상동 법사산(법수뫼)에 있다. 회안대군은 의령군 이맹종, 창녕군 이태, 금성군 이선, 금산군 이중군 등 4남을 두었다. 전국에 회안대군파 자손들은 5만여명으로 추산된다.
당시에 회안대군과 가장 교분이 많았던 최양은 고려말 두문동 출신으로 고려에서 장원급제해 높은 벼슬을 지낸 고급관리다. 정몽주의 조카였으며, 회안대군과 가장 많이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는데 1425년 사망하니 아마 한마을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회안대군이 사망하자 태종은 국장으로 장사를 치르게 했는데 국사였던 무학대사 등 3명의 지관을 보내 길지에 음택을 정하도록 했다. 국장을 마친 지관들의 대군묘지에 대한 설명은 "용진 법수뫼의 대군묘지가 장차 대대로 군왕이 나올 자리"라고 보고한다.
이에 깜짝 놀란 태종은 또다시 형님(방간)자손이 왕이 된다면 다시 자식들간 왕권다툼을 걱정했다. 그리하여 묘의 지맥을 자르도록 하명했다는 항간의 소문이 600년이 지나도록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다. 호사가들의 확인으로 뜸자리가 발견되면서 신빙성이 높은 야사로 여겨진다.
훗날 인근에 고속도로가 난다는 소식을 듣고 종현 이영로의 노력으로 법수뫼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고속도로가 나게 됐다고 한다. 도로개설 보상금은 후손들의 장학금이나 대군묘 봉양비용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 ▲ 구만리 회안대군의 주거터로 추정되는 37번지 밭. 회안대군의 3남인 금성군파 종중소유로 돼 있다. |
회안대군과 이성계 태조와의 부자애도 흥미롭다.
태상왕 태조 이성계가 태종 1년에 익주(익산)에 (의자)의사를 보냈다. 의사는 익주에 와서 회안대군의 병을 치료하였는데 태상왕의 배려였다. 또 행 전의감 양홍달이 익주에 와서 태상왕에게 아뢰기를, 회안대군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라고 하니 태상왕이 사람을 시켜 임금에게 말하기를 "방간이 병들어 장차 죽게 되었으니 급히 의자를 보내라"고 했다.
회안대군이 봉동에서 생활할 때 태종 10년 이방간을 완산에 안치하고 출입을 금했다. 임금이 전라도 관찰사에게 "성밖 냇가에 나가 노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또 태종 7년에는 완산부윤에게 전지하여 회안대군이 성밑근처에서 천렵하는 것을 금하지 말게 하고, 또 관가의 작은 말을 내줘 타게 했다. 태종13년에는 중관을 보내어 방간에게 매 2련을 하사했다. 태종12년에는 중관 한문직을 보내어 회안군에게 내온(술)을 내려주고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지했다. "조그만 말을 타고 감농(농사를 보살핌)하거나 냇가에서 노니는 것을 금하지 말라." 또 술과 고기를 하사했다.
또 태종14년 1414년 4월19일자 태종실록에 회안대군이 보낸 봉상생강을 신하 심종이 받고도 임금께 아뢰지 않은 사건이 있다. 이 생강으로 심종부자와 회안대군이 불이익을 받았다.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청원군 심종의 죄를 청했으나 심종이 지난해 가을에 어가를 따라 남행했을때 몰래 방간이 보낸 생강을 받고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아 대간 형조에서 회안군 부자의 죄를 청하였다" 심종은 태종의 매제였다.
![]() ▲ 회안대군 주거 추정터는 현재 밭인데 아래 논과 경계지점에 큰돌들이 나란히 정연하게 쌓여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
■ 봉동 구만리와 봉강서원
구만마을은 앞으로 활모양의 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있고 뒤로는 만경강 상류인 고산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마을모습이 마치 활을 가득 잡아당긴 모양이라고 하여 궁만리로 불렸다.
그러다 구만리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산수가 어울어지고 기름진 옥토라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뿌리내리고 살았다. 서당이 있었다는 서당리, 소의 그림자늪이라는 우영소, 국상을 당하면 왕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울었다는 망곡제, 물방앗간이 있었다는 물방아거리, 뒤에 강이 있었다고 해 뒷갱변 등 옛지명과 앞산에서 발견됐던 옛 무덤들은 우리 조상들이 수백년동안 대대로 살아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그당시 구만리 천내마을에서 살았다는 회안대군의 세거지로 추정되는 곳이 구만리 37번지 일대이다. 회안대군의 3남인 금성군파 종중소유로 돼 있으며 현재 종중 후손이 밭으로 경작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해당토지 경계지점에 돌담처럼 나란히 길다랗게 돌들이 쌓여 있다.(위 사진)
또한 인근 토지를 확인해보면 지목이 임야로 돼있는 농지가 여러군데 나타나는데, 예전에는 이 일대가 구릉지 임야로 돼 있어 사람이 거주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최근 완주군청에서 이곳 일대를 매입해 주차장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으로 알려져 있어 회안대군의 중요한 역사적 세거 흔적이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봉강서원은 영조30년 1754년에 창건해 전주이씨 회안대군 양희공 망우당 선생을 봉안하고 충간공 국헌 이선생과 공도공 해화당 서선 선생을 추배해 전국의 유림들이 추앙하고 춘추로 봉향했던 곳이다.
![]() ▲ 회안대군 위패사당 |
1930년 대홍수가 일어나 가옥이 많이 붕괴되고 전담이 유실됐다. 그자리에는 웅덩이가 패였다. 전답은 자갈과 모래로 뒤덮여 폐허가 됐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곳에 제방을 쌓고 수십년간 우실된 전답을 복구하고 강변을 개간해 옥토로 만들었다.
정부는 1932년부터 수년간 공사를 진행해 3개수문과 4킬로미터에 이르는 구만제방을 쌓았다.이 때문에 터지네와 새보뜰이라는 새지명도 생겨났다.
경로당앞 밭에는 회안간이학교가 있었다. 1936년 봄 이정구씨와 최충호씨가 신축기성회를 조직하고 온마을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교실관사 운동장을 준공했다. 1937년 개교해 1939년 첫졸업생을 배출했으며 1949년 10월31일 회안간이학교는 폐교되고 학생들은 현 용봉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회안간이학교와 용진 운곡리의 간이학교가 합해져 용진의 용과 봉동의 봉자의 머리글자를 따 용봉초등학교로 승격됐다. 따라서 회안간이학교는 용봉초등학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회안대군의 학문숭상 정신은 500년이 지난 역사속에서 모란서원이 회안간이학교로 변했고 회안간이학교가 용과 봉황을 뜻하는 용봉초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된 사실을 보더라도 전주지역에서는 왕에 준하는 존재로 추존됐음을 알 수 있다.
![]() ▲ 봉강리에 있는 봉정바위가 동네 대나무밭 인근에 방치돼 있다. 바위에 한자로 '봉황 봉, 정자 정' 글자가 새겨져 있다. |
모란서원은 1754년 영조30년에 창건돼 큰일을 맡아보던 임원을 재임이라고 하는데 그 재임록이 있다. 재임록에는 송능수 외에 91인 이름이 나오는데 이름위에 장의, 유사, 별청, 별임이라 써있다. 현재 모란서원 관련서책은 봉강서원이 있는 완주군에서 2017년부터 역사적 가치 평가를 위해 망우당 행장 국역사업을 추진 중이다.
1차로 1754년 용진면 모란동에 모란서원 신축, 2차로 1792년 정조때 봉동읍 봉강리로 이전해 봉강서원으로 개명했다. 3차로 1861년 광무기해로 충간공 국헌 이헌구를 추배하고, 4차로 1986년 공도공 해화 서선을 모셨다.
봉강서원은 유림으로 조직된 교육조직으로 흥학계가 있다. 총원이 214명이니 대단한 모임이다. 흥학계를 만든 해가 1895년으로 100년이 지난 일이라 앞으로 연구해봐야 할 것이다.
'흥학계 좌목' 1책이 있는데, 1909년 이창신이 흥학계에 대해 지은 글이 있다.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는 당위성과 1904년 이봉선이 단임을 맡아 3량을 내었고 이를 자본금으로 삼았는데, 올봄 단임 김휘춘, 심재준, 박원술이 각각 3량을 내었고 여러 선비들이 협의출연하기로 했다. 계이름을 '흥학계'라 하고 아울러 풍습교화에 힘써나가자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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