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고구려때 지명은 물고을이라는 뜻의 '매홀'... 고려시대 400여년간 '수주'로 불렸다

삼국시대-매홀군, 통일신라-수성군, 고려 태조23년 수주, 원종12년 수원도호부, 충렬왕34년 수주목, 공민왕 15년 수원부
조선 수원도호부 이어 수원부-화성유수부-수원군-수원면 변경... 고려말 항복사건 이유로 '수원부에서 수원군'으로 강등

이명선 기자 | 기사입력 2024/09/01 [08:02]

수원의 고구려때 지명은 물고을이라는 뜻의 '매홀'... 고려시대 400여년간 '수주'로 불렸다

삼국시대-매홀군, 통일신라-수성군, 고려 태조23년 수주, 원종12년 수원도호부, 충렬왕34년 수주목, 공민왕 15년 수원부
조선 수원도호부 이어 수원부-화성유수부-수원군-수원면 변경... 고려말 항복사건 이유로 '수원부에서 수원군'으로 강등

이명선 기자 | 입력 : 2024/09/01 [08:02]

▲ 1953년 수원 팔달문앞 거리 풍경


수원은 고구려시대 말로 '매홀'이라 불렸다. 매는 물이라는 뜻으로, 미, 메 라고도 한다. 홀은 '고을' '마을'이라는 뜻이다. 물고을이었던 수원은 서해바닷물이 이곳까지 깊숙이 들어온 곳이다. 고려시대 400여년 동안 '수주'로 불리었다. 

 

▲ 1953년 화홍문일대 모습


물고을이라는 의미의 수원은 고구려-매홀, 삼국시대-매홀군, 통일신라시대-수성군, 고려시대 태조23년 수주 승격, 원종12년 수원도호부 승격, 충렬왕34년 수주목 승격, 공민왕 15년 수원부 승격, 조선시대 수원도호부에 이어 수원부-화성유수부-수원군-수원면으로 변경됐다.

 

▲ 1953년경 수원 팔달문 버스터미널 모습.


그런데 수원이 불명예로 강등됐던 적이 있는데 고려말 공민왕 때로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고려에서 가장 먼저 항복했던 사람들이 수원이어서 '수원부에서 수원군'으로 강등 조치됐다고 한다. 

▲ 1959년 수원시청 본관 모습.


그러다가 1949년 8월 14일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어 수원군으로부터 분리되고,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개칭했다.

 

▲ 수원천 피란민촌의 빨래하는 사람들.


그다음날인 8월 15일 대한민국 지방자치법에 따라 부(府)가 시(市)로 일괄 개칭해 수원시가 되었고, 일본식 행정구역명인 정(町)이 '동'(洞)으로, 정목(丁目)이 '가'(街)로 고쳐졌다.

 

▲ 1950년대 방화수류정 일대. 수류정 아래에 피란민 집들이 보인다.


수원은 예전에 허허벌판이었다. 수원천을 기준으로 북부, 남부로 나뉘고 장안동 남수동 북수동 매향동이 새로 생겼다. 조원동과 파장동은 원래 광주땅이었는데 정조때 수원으로 편입했다. 조원동은 원래 대추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1953년 화서문과 대유평 모습.

 

현재 수원시는 경기도 중남부에 있으며 동쪽은 용인시 기흥구 및 수지구에, 서쪽은 안산시 상록구와 화성시 봉담읍 및 매송면에, 남쪽은 화성시 병점 및 동탄에, 북쪽은 의왕시에 접하고 있다.

 

▲ 1953년 서장대 자리의 관측소 모습.


경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가 분기하고 있다. 경기도 남부의 교통 중심지로, 인천과 여주로 통하는 육로의 기점이 된다.

 

▲ 1957년 수원비행장


수원시의 면적은 121.04 평방킬로미터 주형 분지로 시가지 중앙에는 해발 143m의 팔달산이 있어 공원을 이루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성곽이 둘러져 있다. 동북공심돈을 비롯해 사대문, 봉수대, 방화수류정 등 문화재가 곳곳에 있다.

 

▲ 1954년 수원천 피란민촌 모습.


시 외곽 북쪽으로는 백운산과 광교산이 위치해 있어 높은 구릉지역을 형성하며 서쪽 외곽에는 칠보산 위치해 있어 낮은 구릉지를 이룬다.

 

▲ 1950년대 당시의 창룡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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