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동과 생강] 고려시대 1018년 생강 첫 기록... 봉실산앞 자생설·신만석 사신설 등 유래 다양완산지(1911)엔 봉동생강이 조선왕가 진상품... 1930년대 생강 1섬으로 쌀(90키로) 10섬 구매, 생강농사 1마지기로 논 3마지기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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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동생강 재배 모습. |
[봉동시리즈 3회] "우리 어렸을 적 가을철 시앙 캘 때면 어디서 듣고 왔는지 동네에 꼭 엿장사가 나타났는디, 아부지 몰래 시앙 한 뿌리 갖고 가서 엿하고 많이 바꿔 먹었당게"
1000년 이상 국내에서 생강을 재배해 왔다는 생강원조 전북 완주군 봉동주민들이 그옛날 생강농사지을 적 추억을 떠올리며 하는 말이다. 명칭도 '시앙, 생강, 새앙'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봉상생강, 봉동생강, 완주생강으로도 일컬어진다.
3월1일 완주군문화재단 및 봉동읍지, 박노석 전북대교수 생강관련 발표 자료, 박대선씨의 '몽리, 봉상시앙' 등을 바탕으로 봉동생강 시원에서부터 최근 전통생강보존회의 활동까지 몇차례에 걸쳐 알아본다.
봉동에서 생산된 생강은 조선왕가 진상품이었다.
1911년 발간된 '완산지'에 따르면 전주에서 3월에 진공(진상)해야 하는 물품으로 종강 112두 8승이 있다. 진공(進供)이란 지방의 토산물을 임금이나 상급 관청, 혹은 고관 등에게 바치는 것을 말하는데, 진상(進上)이라고도 한다.
훨씬 앞선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전라도에서는 3월에 종강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1두는 1말과 같으며 1두는 16킬로그램이다. 112두, 1792킬로그램에 달하는 종강을 진상품으로 올렸다는 얘기다.
또 선조실록에는 종강(種薑) 10두(斗)를 옥당에 내사(內賜)하였다.(선조 7년 4월 12일) 승정원일기에는 전라도에서 종강(種薑)을 진상하였다. (중략) 전라도에서 진상한 종강의 낱낱의 수효[수목(數目)]는 대왕대비전 종강 40두, 왕대비전 종강 40두, 대전 종강 40두, 중궁전 종강 30두, 세자궁 종강 20두다.(全羅道種薑進上 (중략) 全羅道種薑進上數目 大王大妃殿種薑四十斗 王大妃殿種薑四十斗 大殿種薑四十斗 中宮殿種薑三十斗 世子宮種薑二十斗(현종 10년 3월 26일)
이렇듯 전라도에서는 3월에 대왕대비전을 비롯해 여러 전각에 종강을 정해진 수량만큼 진상하였다. 이렇게 진상된 종강은 다시 여러 기관에 내려지기도 했다. 이것은 전라도에서 많은 양의 종강이 보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 ▲ 가을철 생강수확 후 생강을 다듬고 있는 모습. |
그렇다면 이 귀한 봉동생강은 국내에서 언제부터 재배하기 시작했을까.
봉동에서 생강이 재배되었다는 설은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자생설이다. 즉, 봉실산 주변의 구바위 밑에서 자라는 향초를 ‘시앙’이라고 불렀다는 것으로, 인도나 중국산과 다른 토종 생강이라는 것인데 구체적인 자료가 없는 상황이다.
다음으로 기자(箕子)가 약재로 사용하고자 종자를 가져와 송도 부근에 파종했으나 실패하고, 충남 청양에서도 실적이 좋지 않았다는 설이다. 하지만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기자와 관련된 여러 설화들은 존재한다. 만약 기자조선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곳은 한반도 북부와 요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지 개성 등과는 관련되지 않는다. 충남 청양 등지와도 맞지 않는다.
또 680년 무렵 사신 신만석이 중국 봉성현(鳳城縣)에서 생강을 가져와 전남 나주와 황해 봉산에 심었다가 실패했으나, 완주 봉상(봉동)에서 재배에 성공해 한국 생강의 시원이 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은 우소저현이라 불렸는데 봉상이라는 지명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중국 봉산현(鳳山縣)에 삼보강(三寶薑)이란 생강이 있다. 이 생강은 명나라 초에 삼보 태감(三寶太監)이 심은 것이라 전하는데, 온갖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강이 생산되는 고장은 오직 전주(全州)의 봉상면(鳳翔面) 뿐인데, 혹시 삼보강을 인용해서 이름한 것인가 또한 기록할 만한 일이다. [이유원 임하필기 제35권 벽려신지(薜茘新志)]
또 500여 년 전 1500년대에 임창봉(林昌鳳)이라는 사람이 봉상(봉동의 옛 이름)에서 재배를 한 결과 생각보다 좋은 풍작을 거뒀는데 그때부터 봉상생강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 최초로 생강이 재배됐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옛문헌에 생강에 대한 기록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먼저, 우리나라 생강 재배 역사에서 이븐 쿠르다지바(820∽912년)의 '諸道路 및 諸王國志(제도로 및 제왕국지)'에 나오는 기록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동해에 있는 나라 신라를 찾는 회교도들이 정주하게 되는데, 수출되는 생산품 중 高良薑(고량강-생강)을 언급하고 있다.
![]() ▲ 생강대를 다듬은 후 쌓아놓은 모습. 수염처럼 길다란 게 강수. |
국내기록으로는 현재까지 생강이 직접 처음 문헌에 언급된 것은 고려 시대다. '고려사' 현종 9년인 1018년에 생강에 관한 기록이 있다.
[현종(顯宗) 9년(1018)] 8월에 교(敎)하기를, “을묘년(乙卯年)[1015] 이래로 북쪽 변방에서 전사한 장수와 병졸의 부모와 처자(妻子)에게 차(茶)·생강[薑]·옷감[布物]을 차등 있게 하사하라”라고 하였다.(고려사 권81 지(志) 권제35, 병1, 병제)
1226년에 편집된 '신집어의촬요방'은 이전부터 왕실에서 전해오던 처방들이 유실될 지경에 이르자 최종준이 새롭게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신집어의촬요방'이 편집된 10년 뒤인 1236년에 향양구급방이 편찬된다. 향약구급방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이용한 처방이므로 생강이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0년전에 편찬된 신집어의촬요방에 기록된 생강도 국내에서 생산되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태종실록에는 1414년 이성계의 넷째아들 회안대군 방간이 봉동에 거주하면서 선물로 생강을 보낸 기록이 있다. 생강을 선물받은 관리 심종이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태종 14년(1414년 4월 19일 임술 2번째, 영락 12년) 司憲府疏請靑原君 (沈悰)〔沈淙〕罪。悰〔淙〕於去年秋, 扈駕南幸時, 潛受芳幹所遺之薑, 不以上聞故也。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悰)의 죄를 청하였으니, 심종이 지난해 가을에 어가(御駕)를 따라 남행(南幸)하였을 때에 몰래 방간(芳幹)이 보낸 생강(生薑)을 받고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추원 1918년 '鳳翔시장과 생강' 편에 봉동면 장기리에 시장을 신설했으나 시장부지가 좁아서 대정 8년(1919)에 현재의 시장(종래의 시장 동쪽 인접지)으로 이설했다고 하는데 시장은 매월 음력 5일, 10일에 열리며 주요상품은 수산물, 축류, 직물, 생강, 곡류"라고 기록돼 있다.
또 최영년(崔永年)이 1921년에 저술하고 1925년에 출간한 '해동죽지'에도 고려시대의 생강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서 생강을 재배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전주에서는 종강을 직접 생산하고 있었다고 한다. 허준이나 허균 등 저술을 통해서도 전주의 생강이 최고라고 평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전부터 전라도의 생강 상인들은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판매했다고 한다.
![]() ▲ 장기리지역 양정 일대 지도(1911년) |
한편, 1840년에 발간된 성해응의 '연경재전집'에는 양장포,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는 양정포에서 생강이 재배된다고 전했다. 양장포 또는 양정포는 지금의 봉동 장기리 지역이다. 이 지역은 관개수로가 발달되고 토지가 비옥해 생강농사에 적지였던 곳으로 종강도 생산했다.
1911년에 인쇄된 지도에는 양정(良井)으로 되어 있으며, 봉동읍 상장기 공원에 있는 비석 중 첫 번째에 있는 판관 신사영 만세불망비에도 양정(良井)으로 기록돼 있다.
낙평리의 북쪽, 봉동초등학교 뒤편 일대에 양정이 있는 것으로 지금의 임거, 오황, 한계마을이다. 또는 넓게 보면 장기리에서 그 서쪽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1931년 11월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봉상산업조합의 눈부신 성과가 눈길을 끈다. 그당시에 생강수확량이 총 1만여 석으로 매상은 11만원에 달해 조합 창립 3년 만에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그당시 봉동면 2000여 호 중 700여 호 조합원이 집집마다 생강을 재배할 정도였다.
이듬해인 1932년 봉상생강 증식계획 성공으로 1934년에는 연 1만5000석을 수확해 20만원을 넘었다. 1930년 기준으로 쌀 1가마에 13원이었다고 하니 현재 가치로 대략 27억여원에 달한다. 봉상산업조합 제5회 정기총회에는 인근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조선 전체 72개소 조합 중 가장 모범적인 조합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처럼 생강은 봉동주민들의 주 소득원으로 1930년대 전조선 수출품로 대서특필됐을 정도였다. 국내 신문에서는 봉동생강조합 성공 사례 보도가 이어졌다.
![]() ▲ 봉동의 전통 생강굴 |
당시 생강 1섬으로 쌀(90키로) 10섬을 받았으며, 생강농사 1마지기로 논 3마지기를 살 정도로 생강가격이 높았다. 생강농업 중심은 봉동면 낙평리와 장기리 일대로, 사질토의 좋은 토양에 종자생강을 온돌식 생강토굴에 관리해 최고 품종을 유지하며 매우 높은 가격으로 판매됐다. 생강농업은 지역 인근지역까지 확대됐으며 도소매 또는 각자 전국 각지에 팔려나갔다.
당시 낙평리 이정원씨집 생강토굴이 봉동에서 제일 컸다고 알려졌으며, 볏짚으로 불을 땠기 때문에 겨울에도 생강이 냉병에 걸리지 않아 최상급 종자생강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들 이한일(64)씨는 "우리집에 기둥 아래로 생강굴이 4개 있어서 봉동에서 제일 컸지. 예전에 완주군에서 우리집을 사서 옛모습으로 복원하겠다고 했는데 우리집에서 모두 거절했어. 지금은 생강굴이 다 부서져서 거의 형태가 없어졌고 그당시 생강재배 관련자료도 전부 사라졌다"라고 전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봉동 신진상회 등 서울 중앙시장 등으로 판매하는 서울 직판 판로가 있었고 199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봉동은 전국에서 생강농업의 독점적 지위를 가졌다.
최근 들어서는 농업 환경 변화와 수입 개방에 따라 봉동 종자생강이 위기를 맞고 있다. 합성비료 사용과 농업 환경 변화로 연작피해 발생하고 외지로 나가 생강농사를 지으면서 생강 농법 및 저장 기술이 유출됐다. 게다가 저온창고 등장으로 충남 서산과 경북 안동 등지가 생강 농사 주력지로 부상했다. 또 중국산 생강(개량종) 유입으로 종자생강 농업이 위태로워졌다.
현재 생강농업지인 서산의 경우 일제 강점기(1931년) 봉동 출신 생강농업인 박영석씨가 서산으로 경작지를 옮기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박영철(전국생강연합회장)씨 조부인 박영석씨가 생강 1접(9킬로그램, 15근)을 봉동에서 구입해 식재한 것이 서산생강의 기원이 됐다.
서산의 생강토굴은 수직강하식과 수평식 토굴만 있는데 반해 구들식 생강굴은 봉동에만 존재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한편, 봉동 고유의 생강 음식문화로는 매운탕의 ‘잡내’를 잡는 생강 수염 강수(薑鬚)요리, 여름철 최고의 도시락 반찬 ‘개악장아찌’,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는 고급 간식 편강(片薑)과 생강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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