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시에 대비해 조성했던 '남한산성' 불멸의 성으로 간직 보호해야"민정기 '남한산성 유감' 기고문... 21개 문 수비하기 좋게 조성... 우뚝 솟은 청량산 주산으로 수어장대 정상에 자리
禪庵求道 本營成, 行宮改築 復元屹, 史蹟加存 不滅聲.
남한산성엔 상서러운 채색기운 생기니 남사모의 애국심이 길이길이 빛나리라 긴 노래 다 부르며 심력으로 노래하고 미주에 기분좋게 취해 성정을 즐기는구나
세계에 드리워진 이름 진리를 체득하고 청량산 선암 구도하며 본영 이룬곳이라 행궁을 개축 복원하여 우뚝 솟게하고 사적을 보존함으로 불멸의 성이 되리라
(칠언율시 측기식 편격, 庚統 : 生, 明, 情, 成, 聲)
지난 5월27일 오전 10시 남사모(南思慕: 남한산성을 사랑하는모임·회장 김내동)가 주관하는 마지막 토요일 정기모임이 남문고을 식당에서 열렸다.
이전부터 참여하라는 권유를 수차례 받아오던 터라 오늘은 아침도 거른 채로 일어나자마자 유서깊은 남한산성도 보고 남사모 회원들도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파악도 할 겸사겸사로 참석하기로 하고 출발했다.
사실 남한산성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우선 현절사에서 병자호란 때 우국지사인 홍익한·윤집·오달재 등 삼학사의 사당을 보고, (우리 회원 모두는)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가서 곤욕 끝에 참형을 당한 삼학사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머리를 숙이고 참배를 했다.
이것 때문에 남한산성에 행궁을 건축해 놓고 우국충정의 이런 정신을 길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김내동 남사모 회장은 이곳에서 백범 김구 선생님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시낭송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 또한 얼마나 이러한 환경에 꼭 알맞은 시가 아닌가 하고 시낭송을 열심히 했다. 삼학사가 우는 것인지 비가 나리고 산천이 모두 함께 울부짖는 듯했다.
우리는 또한 청량산 개원사 잠개문 앞에서 사무총장의 설명을 들었다. 남한산성에는 절이 많이 건축되어 있는데, 각 도를 대표한 절이 각각 8개가 있고 개원사가 이 8개의 절을 대표하는 주도하는 가장 본원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려들을 총지휘하는 본영 사찰로 건립된 곳이다.
이 개원사 대문의 현판을 예서체로 예쁘게 썼는데, 그 서예가가 바로 우리나라 서예를 대표하는 4형제중의 한 서예가라고 한다. 이에 전문가 수준인 신흥식 서화연구회 회장 등 몇 사람이 나서 설명을 해 주었다. 이 개원사 현판을 쓰신분이 누구라고 하는데 한국 서예를 개척하고 일가를 이룬 사형제중 한 사람이였다. 안동김씨 자손인데 경인(褧人) 김문현(1913-1974), 일중(一中) 김충현(1921-1974), 백아(白牙) 김창현(1923-1991), 여초(如初) 김응현(1926-2007)들이 있는데, 아마도 둘째인 일중이 아닌가 생각한다.
남한산성에는 문이 몇 개나 될까. 22개의 문이 있다고 한다. 사대문과 16개의 암문 그리고 수문 1 내성문 1이상 22개 문이 있다. 김태홍 사진작가의 “남한산성 8회 개인전”인 “들꽃 남한산성을 품다”를 보고왔다. 남사모가 끝나고 김태홍 사진작가와 함께 온암겔러리에 가서 남한산성의 18군데의 사진의 묘미를 설명듣고 왔다.
예를 들면, 숭렬전은 눈괴물주머니의 꽃이 피어있는데 그 꽃 말은 보물주머니라는 것이다. 백제시조인 온조대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 앞에서 2021년 9월에 찍은 사진인데 정말로 그 눈괴물주머니란 꽃이 왜 거기에 나지막하게 피어있는 것일까. '넌 왜 거기에 피었니?' 하고 묻고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있는 사진이다.
더군다나 지금 그곳에 가면 그 꽃을 볼수가 없다고 한다. 단지 9월에 가면 혹시나 찾아볼 수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분명히 그때 그 장소에 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진을 다 구경하고 나서 우리는 차 한잔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거기에다가 내가 평소 존경해서 시낭송을 자주하는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여기 남한산성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나는 곧 당장 그곳으로 가자고 해 만해기념관도 구경하고 왔다. 그곳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다.
특히, “무제(無題), 이순신 사공삼고, 을지문덕 마부삼아, 파사검(破邪劍) 높이 들고, 남선북마(南船北馬)하여 볼까. 아마도 님 찾는 길은 그뿐인가 하노라”라고 하는 그의 시구에서 그만의 독특한 독립운동 정신을 볼수가 있었다.
이렇게 훌륭하신 만해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여기 남한산성에 있을줄이야! 더군다나 전보삼 만해기념관장이 바로 점심을 먹을 때 내 옆자리에서 나에게 명함을 주신 바로 그분이었다니. 정말로 오늘 하루가 매우 값비싼 하루였음을 보증한다. 만해 선생님! "알수 없어요?" 알수 없는 이세상 정말로 감사합니다.
(참고) 남한산성은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진산으로 여겼다. 말하자면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 온조를 모신 사당 숭열전이 자리 잡은 것도 이러한 정신을 이어가자는 의지가 돋보이는 것이고,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행궁을 한양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인조 4년(1626)에 건립했는데, 실제로 병자호란이 발생(1636)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란해 47일간 항전했다. 결국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러한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역사의 현장 속에서 배워야 할 것이 그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이지만 1894년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해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남한산성 마을 사람들이 80~100년생 소나무 군락지에 대한 무분별한 벌목을 방지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금림(禁林)조합을 만들어 소나무를 심고 보호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남사모의 활동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다. 남한산성을 불멸의 성으로 간직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다. 특히, 남한산성의 행궁은 전시를 대비한 행궁이다. 그래서 21개의 문은 수비하기 좋게 만들어졌고 유지되고 보수돼 왔다. 특히 우뚝 솟은 청량산(479m)을 주산으로 해 수어장대가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인공적인 변화를 최소화하기 위해 기단을 조성하여 높낮이를 조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높은 기단의 축조는 경사도가 컸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남한산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자연경관이 우수하고 호국의 얼이 살아있는 실천장으로 일반인들에게 활용되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저작권자 ⓒ 경인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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